결정, 그리고 프레임이 깨지던 순간들


고민은 계속 해왔지만 어디까지나 직장인이란 틀 안에서의 고민이었다.

어느 회사로 갈까, 어떤 직급으로 갈까. 어떻게 보면 고민한다고 했지만 주어진 길 안에서의 고민이었던 거지. 암튼 그랬었는데 이제 큰 조직생활과 리더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는 일들이 여러가지 일어났고 AI 시대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다가 왔으며 남편 또한 꽤 유사한 소용돌이 속에 놓여져 있었다. 그 와중에 우리의 최애 부부는 집을 팔고 세계여행을 떠나겠다고 했다.

여러가지 계기가 모여 우리의 생각을 열리게 했고, 몇 달간의 토론을 거쳐 두려운 요소들을 소거해가며 우리는 결국 결정했다.

현재의 삶을 잠시 중지하고 해외로 떠나기로.
영어를 장착하고 일하는 방식의 전환을 시도해보기로.

결정을 한 후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리고 사람들의 질문에 답하다 보니
1) 이런 생각을 하게된 몇가지 큰 계기가 있었고
2) 결정에 영향을 준 요인들이 있었더라.

그걸 남겨보려 한다.

여러 방향으로 생각하게 된 계기

  1. 행복한 리더는 어디에
    나는 현 직장에서 처음 리더를 했고 그러다보니 온 마음을 쏟아 열정을 다해 신입 시절로 돌아간 것 처럼 4년간 일했다. 주로 기쁘고 뿌듯했고 가끔 힘들고 속상했다. 리더를 해보니 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도닥이고 독려하며 성장을 도울 수 있는 리더 였고 꽤 잘했다고 생각한다.

    허나 사람들의 실제 역량은 다 다르다보니 당연히 노력과 성과는 비례하지 않았으며 평가를 위해서는 팀 안에서 순위를 세울 수 밖에 없었다. 평소 칭찬하며 독려 했어도 평가를 잘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평소에 독려한 것이 오히려 그 간극을 키웠다. 물론 칭찬만 한다고 좋은 리더인 것도 아니고 잘 못하는 점에 대한 피드백을 주고 그것에 대해서 달성하지 못했을 경우 평가가 낮을 수 밖에 없단 것도 잘 안다.

    다만, 부족한 점을 알려주고 노력해서 달성 했고 칭찬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성과가 낮거나 그러한 역할일 경우엔 평가가 낮을 수 밖에 없는데, 회사에서 제시하는 방안은 평소 부족한 점을 더 많이 이야기해서 기대치를 낮추고 평가와의 간극을 줄이라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더 높은 자리에 오르면 사람보다 목표가 중요해지고, 위에서 내려오는 지령을 잘 수행해야 하는데, 그것이 나의 가치관과 맞지 않는 일이 많아지면 결국 병이 들거나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 리더가 돼야만 할 것 같았다. 극단적인 표현일 수 있고 중도를 잘 지키며 열심히 하시는 분들도 많지만, 내 주위에는 실제로 스트레스로 인해 몸이 안 좋아지거나 병이 나서 그만두신 리더분들도 꽤 많았다.

    나는 이제까지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허물없이 가까이 지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큰 기업의 조직장은 그러면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편애한다는 이야기가 생길 수 있고, 권한으로 무언가를 강요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고, 여러 가지 조심해야 하는 지점이 있으니 적당히 거리를 두어야 했다.

    세상엔 많은 리더들이 있고 그들 모두가 겪는 어려움일 것이며, 모두가 그럼에도 잘 해내고 있을 것이다. 근데 왜 나만 이렇게 유별나게 다르고 싶어서 저런 것들을 가지고 괴로워하는지, 내 탓도 많이 해봤다. 엄청나게 괴롭거나 무너질 것 같은 힘듦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저런 부분들에 대해 고뇌 없이 그냥 순응하고 살아지는 상황이 싫었고, 자꾸 다른 생각이 들었고, 계속 고민이 됐을 뿐이다.

  2. AI, AI 그리고 AI
    AI 시대가 무섭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이미 와 있었다.

    불과 몇 달 만이었다. 클로드와 코덱스를 경험한 불과 몇 달 만에 생각의 틀이 완전히 바뀌었다. 두렵고 불안하고 많은 감정을 겪었다. 나만 조금 더 열심히 하면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 없었다. 도구와 리소스의 한계가 없어져버렸다. 게다가 그것이 발전하는 속도 자체도 말이 안 되게 빨랐다. 수많은 직군이 사라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내가 대기업 품에서 이대로 1년을 다니는 것과, 다른 대기업으로 이직해서 새로 전략 짜고 적응하는 데 1년을 쓰는 것과, 세상에 나를 던져서 스스로 무언가를 계속 만들어내고 배우는 데 1년을 쓰는 것의 가치가 엄청나게 차이가 날 것이 뻔했다. 거기에 영어까지 잘할 수 있게 된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그쪽이 훨씬 컸다.

  3. 우리는 불행한 부자가 된걸까?
    그간 몇 번의 이사를 통해 부동산에 투자하며 자산을 쌓았다. 사실 그렇게 부자는 아닐 것 같은데 내 기준엔 꽤 부자였다. 우리의 소비는 여행을 제외하면 적은 편이었고 월 수입도 벌만큼 벌었지만 수입의 큰 부분은 이자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꽤 즐겁게 사는 편이었다. 아이가 없고 둘이 사이가 좋고 취미가 잘 맞아서 국내외로 여행을 자주 다녔다. 그러나 수면 시간을 빼면 인생의 절반을 보내는 직장에서의 행복감은 크지 않았다. 아니 괴로웠다. 몇년간 사업을 하다가 스타트업의 CPO로 재직 중인 배우자는 더했다. 사람을 도구로 생각하는 CEO의 가치관을 따라 행해야 하는 괴로운 일이 많아졌고 점점 시들어갔다.

    누군가는 말할거다. 직장을 재미로 다니나? 네 전 재미와 자아실현과 성장을 위해 다녔답니다. 그러기 위해 열심히 했고 노력했고 이직해왔다. 사실 엄청나게 괴롭거나 무너질 것 처럼 힘들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런 부분들에 대해 고뇌 없이 그냥 순응하고 살아지는 상황이 싫었다. 자꾸 다른 생각이 들었고, 계속 고민이 됐다.

    우린 뭘 위해 이자를 내고 불행을 감수하고 있는 걸까?

  4. 세상엔 다양한 길이 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우리가 힘들어졌다고 해도 이 소식이 없었다면, 이 선택의 시작이 될 그 작은 씨앗이 생겨나지 못했을 수 있다.

    서로 가장 영향을 많이 받고 교류가 많은 최애 부부가 집을 팔고 세계여행을 가겠다고 결정했을 때,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고 우리의 삶에 대해 생각했을 때, 그들의 불안과 두려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려진 그들의 결정에 대해 생각하면서 우리의 생각의 결계 또한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틈새로 흘러들어온 씨앗은 생각보다 빠르게 무럭무럭 자라나서, 우리가 몇 년간 잘 가꾸었다고 생각해왔던 정원의 차원을 비틀어버렸다. 3차원의 작은 정원이 중력이나 물리 법칙을 무시한 뒤죽박죽 신나는 공간으로 바뀌어버렸다고 해야 할까? 관성을 이겨내고 가진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두려움이 아주 컸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 공간을 엿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 3편에서 계속

  1. 그냥, 그 시기가 또 온줄만 알았다.
  2. 결정, 그리고 프레임이 깨지던 순간들
  3. 결정할 수 있었던 이유
  4. 그래서 뭘 어떻게 한다는 건지
  5. 결정 그 후, FOMO에 대하여
  6.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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